윤미라의 추억!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그녀는 누구?
안성 서운산 청룡사 영상
배경음악 : 김영동 – 춤
배경음악은 김영동이 작곡한 춤이다.
장터에서 거리공연을 마치고 남사당 패들러들이 연주하는 노래입니다.
귀국을 기념하며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오늘 이야기할 주제는 안성 남사당 바우덕, 그녀는 누구인가?
바우덕이는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기록이 없다.
그러나 안성 서운산 자락 청룡사 근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의 입소문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그리고 윤미라 주연의 추모영상 남사당이 1974년 작품으로 발표된 지 50년이 흘렀다.
영화의 스토리를 보면 비단왕이 안성 청룡사에서 들은 이야기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잘 어울리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 배경은 고종이 즉위한 지 2년 후인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한 것이다.
노동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경복궁 공연에 불려갔다.
당시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기를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바우덕이의 유일한 공식 기록이다.
1850년대 조선의 상황은 강화도령 철종에서 고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평안도에서는 홍경래의 난이 처리되는 아찔한 시기였다.
비리 관료들의 약탈이 늘어남에 따라 크고 작은 폭동의 시대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평안도 홍경래의 봉기…
이후 반란은 정부군에 의해 간신히 진압됐지만 그 여파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부패한 관리들이 계속해서 착취하고 민생이 절정에 달했던 때였습니다.
관직을 사기 위해 돈가방을 들고 한양까지 가야 했던 형편없는 시대,,,
삼국의 무질서가 극에 달한 시대,,,
즉 노론의 권력과 정치가 고종과 대원군에게 이양되는 시기였다.
경작되지도 않은 황무지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습니까?
죽은 자나 아이들에게 군용 포병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까?
곡식을 빌려줄 때 모래와 자갈이 가득한 곡식을 빌려주지 않습니까?
그 결과 이주민의 수가 증가했고 결국 사람들은 재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가 탄생했다.
아~ 보덕은 추사 김정희 말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때 활동한 분이 경허스님이셨는데,,,
조선불교의 자존심을 세웠다는 경허스님의 생년은 1849년생이다.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도 이때 탄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경허스님과 바우덕이는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우덕이가 5세쯤 되었을 때 농장일을 하던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안성 남사당에 맡겨졌다.
그리고 15세에 당시 안성남사당장 윤치덕이 세상을 떠났다.
남사당 규약을 깨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곡두쇠로 뽑혔다고 한다.
갱단의 우두머리는 남자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관습을 깨뜨렸다.
지금도 안성에서는 전설적인 바우덕이를 기리는 행사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안성 청룡마을 비석 앞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곡두쇠 바우덕이(김암덕)가 태어난 곳이라고 쓰여 있다.
바우덕이가 5살이 되던 해, 농장일을 하던 그의 부모는 병으로 더 이상 그를 돌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마을의 남사당에 맡겨졌다.
바우덕이(김덕암) 사당이 대한불교조계종 경주정과 청룡사에서 사용승인을 받았다.
2005년 9월에 건립된 신사입니다.
청룡시청 앞, 대한불교조계종 청룡사와 바우덕이사당 중간에 있다.
오른쪽으로 300m 정도 가면 바우덕이 사당이고, 왼쪽으로 300m 정도 올라가면
밴드 안성남사당의 본고장인 청룡사가 등장한다.
안성 서운산 청룡사는 조계종의 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다.
대신 위의 문은 일주문이나 천왕문의 대용으로 쓰인다.
농장 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바우덕이는 5세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딸을 더 이상 돌볼 수 없게 되자 서운산 청룡사 남사당에 맡겨졌다.
제 이름은 김암덕입니다.
보덕이라는 이름은 남사당에서 지어준 것으로 보인다.
어디에서 왔는지, 아버지의 성을 모른다고 하더군요,,,
여하튼 남사당의 바우덕이는 이곳에 위탁생활을 하다가 20살쯤부터 폐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리고 1870년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래 안성 청룡사는 바우덕이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기도 하다.
18세기 중반 안성 청룡사는 순조 때부터 남사당에 맡겨졌다고 한다.
당시 남사당은 안성장을 비롯한 전국의 장터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사물놀이, 판소리, 현탁 등 예술품을 팔아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유목민 집단이었다.
안성에 주둔하던 남사당 노잡이들은 서운사 청룡사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그 밖에도 산행을 하고, 마을을 돌아다니고, 창고, 저것, 요장까지 다녔다.
자, 안성시 보개면에 가면 남사당 수련원이 있습니다.
그들의 후손들은 주말마다 사물놀이, 줄타기 등의 예능을 선보입니다.
안성 청룡사 버스정류장에 위치한 전통막걸리집입니다.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도토리묵을 만들어 팔던 원조할머니가 운영하는 곳이기도 하다.
할머니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결혼한 것이 60년 전이라고 한다.
당시 마을 어르신들, 안성남사당 여주인 바우덕이,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김경화에게.
그리고 당시 청룡사 승려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50년 할머니가 이곳에서 처음 시집을 갔을 때 청룡사는 대만에서도 매우 가난했다.
보리껍질죽을 밥 먹듯 먹었고, 그것도 아니면 산에서 나무뿌리 같은 것을 캐서 죽으로 먹는 날도 많았다.
그러면서 당시 남사당 식구들이 청룡사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에 장마당에서 번 돈으로 쌀, 보리 등 농작물을 산다.
승려들과 나누었다고 한다.
150년 전, 1870년대,,,
겨울이 다가오면 바우덕이와 안성남사당악단 단원들이 이곳을 지나 청룡사에 들어가 스님과 함께 은거를 한다.
그 당시에는 댐이 없었을 것이므로 이곳은 깊은 계곡이었을 것입니다.
이 계곡을 건너 겨울 숙소로 갔겠죠?
바우덕이묘지 앞을 달리는 후미길이다.
앞쪽 계곡 오른쪽으로 바우덕이묘지가 있다.
바우덕이의 무덤은 장마날 유실되어 현재의 무덤을 가묘라 한다.
바우덕이는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사당 당원 김경화라는 사람이 이곳 개울가에 묻었다고 한다.
여름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 불어난 개울에 흔적도 없이 떠내려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무덤은 보덕의 시신이 없는 임시 무덤이 되었다.
그런데 안내문에는 바우덕이가 이곳에 묻혀 있다고 하니 의아하기만 합니다.
바우덕이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남자들만의 세계인 남사당의 족장 꼭두쇠를 연기했다.
그녀는 그룹에서 유일한 여성이라고합니다.
이처럼 남자들의 세계에 녹아들며 노래와 예능을 다져온 바우덕이는
그녀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져 주변 남자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 가운데 남사당에 김경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경화는 바우덕이를 열렬히 동경했다.
나이가 좀 많다고 하더라구요
떡집 할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40세였다고 한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거의 50세였다고 하는데,,,
하지만 다른 젊은 남자 사당들도 많고, 많은 상황에서 바우덕이를 남보처럼 사랑할 수는 없겠죠?
바우덕이와 함께 시장을 거닐고 음악과 예술을 함께 만드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녀는 20살 때 소비라는 병에 걸렸다.
상황이 진행되자 하나, 둥, 바덕은 병이 전염될까 봐 남사당 일행을 떠났다.
결국 바우덕이는 병든 몸을 이끌고 청룡사 근처 한적한 곳에 정착한다.
당시 김경화는 바덕의 곁을 지키며 끝까지 그를 지켜준 인물이었다.
김경화는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끝까지 누워만 있는 바우덕이를 돌봤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하루 종일 코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일을 처리했습니다.
바우덕이가 23세에 세상을 뜨자 이곳 개울가에 묻혔다.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그 후 아무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안성 남사당의 예술가들이 억새밭에 묻힌 바우덕이의 묘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했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곳 강변에 다시 무덤을 세웠다고 한다.
안성의 민요 바우덕이
안성청룡 바우덕은 열심히 듣고 돈을 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은 치마만 들어도 돈 번다
안성 청룡 바덕이 줄을 타고 돈이 쏟아진다
안성청룡 바덕이 바람에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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